레비트라로 찾는 남성 호르몬 밸런스와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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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살성햇 작성일26-02-17 13:44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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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트라로 찾는 남성 호르몬 밸런스와 자신감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남성들이 피로, 무기력, 성욕 감소, 그리고 발기부전 등의 문제를 겪으며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 바로 호르몬 불균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남성호르몬, 특히 테스토스테론의 감소는 다양한 신체 기능에 영향을 미치며, 남성성을 위협하는 핵심 요인이 됩니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를 전문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솔루션 중 하나가 바로 레비트라입니다.
남성의 몸은 테스토스테론이라는 강력한 호르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호르몬은 근육 형성, 지방 분해, 심혈관 건강, 인지기능, 기분 조절, 그리고 성기능까지 광범위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30대 후반부터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점차 감소하게 되며, 그 결과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쉽게 피곤해지고, 운동 효과가 줄어들며, 성욕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하락하게 됩니다.
호르몬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건강관리 차원을 넘어서, 남성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입니다. 전문가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기준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성기능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성기능 저하 문제는 부부 관계와 사회적 자신감에 직결되기 때문에, 조기 대응이 필요합니다.
레비트라는 남성 성기능 개선제 중 하나로, PDE5 억제제 계열에 속합니다. 이 약물은 성적 자극이 있을 때 음경으로 가는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를 도와주는 원리로 작용합니다. 즉,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감소해 발기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도, 레비트라는 그 기능을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특히 레비트라는 빠른 흡수와 작용 시간의 적절한 균형으로 사용자 만족도가 높습니다. 평균적으로 복용 후 30분 이내에 효과가 나타나며, 4~5시간 동안 작용을 유지합니다. 이는 사용자가 성적 활동을 계획하고 자연스럽게 상황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약물에 의존한다는 부담감 없이 자신감을 회복하게 해줍니다.
레비트라는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일상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테스토스테론 저하로 인한 기능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성기능 저하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모든 약물이 그렇듯, 레비트라도 올바르게 사용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복용 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특히 심혈관 질환, 고혈압, 간질환 등의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 상담을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
또한 레비트라는 음식과 알코올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지방 식사나 과도한 음주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공복 상태에서 복용하면 흡수가 더 빠르며, 성적 자극이 있을 때만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약물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반응과 맞물려야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반복적인 실패 경험으로 자신감을 잃은 남성들에게는, 레비트라의 빠른 효과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자신감은 결국 긍정적인 성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이는 다시 호르몬 밸런스를 회복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직장인 박씨는 40대 중반부터 성욕 감소와 발기력 저하로 고민했습니다. 업무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몸의 컨디션은 나빠졌고,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도 소홀해졌습니다. 전문가 상담 후 박씨는 레비트라 복용을 시작했으며, 첫 사용부터 효과를 느꼈습니다. 마치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자신감이 돌아오니 일상도 밝아졌습니다. 그는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레비트라를 활용하며 건강한 부부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50대 초반의 김씨는 은퇴 후 의욕을 잃고 있었습니다. 성기능 저하는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고, 어느 순간 가족과의 대화조차 줄어들었습니다. 김씨는 전문가의 권유로 생활 습관 개선과 함께 레비트라 복용을 병행했고, 한 달 후 다시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회복되는 느낌이라며, 레비트라가 단순한 약이 아닌 새로운 출발의 열쇠였다고 말합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감소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 의학은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으며, 레비트라는 그 중에서도 즉각적인 효과와 간편한 복용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솔루션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호르몬 밸런스 회복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 영양 섭취, 스트레스 관리 등의 생활 습관 개선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성기능 저하가 일상의 질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경우, 레비트라는 빠르게 회복의 길로 이끌어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되찾는다는 것은 단지 성적 능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삶의 활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레비트라는 이 변화의 중심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입니다. 이제는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전문가의 조언과 함께 레비트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에너지 넘치는 자신을 만나보세요.
호르몬 밸런스가 회복되면, 당신의 삶도 달라집니다. 레비트라는 그 시작을 함께하는 신뢰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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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정 술과 함께 복용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음주 후 복용 시 효과가 떨어지거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안전하게 복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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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트라로 찾는 남성 호르몬 밸런스와 자신감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남성들이 피로, 무기력, 성욕 감소, 그리고 발기부전 등의 문제를 겪으며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 바로 호르몬 불균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남성호르몬, 특히 테스토스테론의 감소는 다양한 신체 기능에 영향을 미치며, 남성성을 위협하는 핵심 요인이 됩니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를 전문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솔루션 중 하나가 바로 레비트라입니다.
호르몬 밸런스가 중요한 이유
남성의 몸은 테스토스테론이라는 강력한 호르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호르몬은 근육 형성, 지방 분해, 심혈관 건강, 인지기능, 기분 조절, 그리고 성기능까지 광범위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30대 후반부터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점차 감소하게 되며, 그 결과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쉽게 피곤해지고, 운동 효과가 줄어들며, 성욕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하락하게 됩니다.
호르몬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건강관리 차원을 넘어서, 남성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입니다. 전문가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기준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성기능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성기능 저하 문제는 부부 관계와 사회적 자신감에 직결되기 때문에, 조기 대응이 필요합니다.
레비트라성기능 저하 해결의 실질적 방법
레비트라는 남성 성기능 개선제 중 하나로, PDE5 억제제 계열에 속합니다. 이 약물은 성적 자극이 있을 때 음경으로 가는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를 도와주는 원리로 작용합니다. 즉,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감소해 발기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도, 레비트라는 그 기능을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특히 레비트라는 빠른 흡수와 작용 시간의 적절한 균형으로 사용자 만족도가 높습니다. 평균적으로 복용 후 30분 이내에 효과가 나타나며, 4~5시간 동안 작용을 유지합니다. 이는 사용자가 성적 활동을 계획하고 자연스럽게 상황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약물에 의존한다는 부담감 없이 자신감을 회복하게 해줍니다.
레비트라는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일상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테스토스테론 저하로 인한 기능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성기능 저하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전문가의 조언레비트라를 안전하게 활용하는 법
모든 약물이 그렇듯, 레비트라도 올바르게 사용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복용 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특히 심혈관 질환, 고혈압, 간질환 등의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 상담을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
또한 레비트라는 음식과 알코올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지방 식사나 과도한 음주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공복 상태에서 복용하면 흡수가 더 빠르며, 성적 자극이 있을 때만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약물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반응과 맞물려야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반복적인 실패 경험으로 자신감을 잃은 남성들에게는, 레비트라의 빠른 효과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자신감은 결국 긍정적인 성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이는 다시 호르몬 밸런스를 회복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사례로 보는 레비트라의 실제 효과
직장인 박씨는 40대 중반부터 성욕 감소와 발기력 저하로 고민했습니다. 업무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몸의 컨디션은 나빠졌고,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도 소홀해졌습니다. 전문가 상담 후 박씨는 레비트라 복용을 시작했으며, 첫 사용부터 효과를 느꼈습니다. 마치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자신감이 돌아오니 일상도 밝아졌습니다. 그는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레비트라를 활용하며 건강한 부부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50대 초반의 김씨는 은퇴 후 의욕을 잃고 있었습니다. 성기능 저하는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고, 어느 순간 가족과의 대화조차 줄어들었습니다. 김씨는 전문가의 권유로 생활 습관 개선과 함께 레비트라 복용을 병행했고, 한 달 후 다시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회복되는 느낌이라며, 레비트라가 단순한 약이 아닌 새로운 출발의 열쇠였다고 말합니다.
호르몬 밸런스와 레비트라남성 자신감의 든든한 동반자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감소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 의학은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으며, 레비트라는 그 중에서도 즉각적인 효과와 간편한 복용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솔루션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호르몬 밸런스 회복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 영양 섭취, 스트레스 관리 등의 생활 습관 개선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성기능 저하가 일상의 질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경우, 레비트라는 빠르게 회복의 길로 이끌어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되찾는다는 것은 단지 성적 능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삶의 활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레비트라는 이 변화의 중심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입니다. 이제는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전문가의 조언과 함께 레비트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에너지 넘치는 자신을 만나보세요.
호르몬 밸런스가 회복되면, 당신의 삶도 달라집니다. 레비트라는 그 시작을 함께하는 신뢰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구구정 약국에서는 정품을 안전하게 구매할 수 있어 많은 분들이 선호하는 구매처입니다. 온라인보다는 약국에서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며 구입하는 것이 부작용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구구정 한박스를 찾는 경우도 많은데, 일반적으로 포장 단위는 4정 또는 10정으로 구성되며, 약국에 따라 구성이나 가격이 다를 수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구구정 술과 함께 복용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음주 후 복용 시 효과가 떨어지거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안전하게 복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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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배우의 데뷔 초기 모습.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로 서구형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화면에서 올차고 여문 느낌을 줬다. 작가 정비석이 그를 만난 후 “뭇 남성들을 매혹하는 요부형 여성”이라고 평했으나, 요부역뿐만 아니라 곡절 많은 비애의 여주인공 역도 잘 소화해냈다. 한국영상자료원
최근 타계한 김지미(1940∼2025), 안성기(1950∼2026) 배우를 한자리에서 본 적이 있다. 지난 2010년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은퇴 파티에서였다. 이날 기념 촬영을 할 때 안성기 배우가 골드몽게임 김지미, 신성일 등 선배들을 단상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지미는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으로 와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붐비는 홀에서 문성근이 홀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1990년대에 영화계가 신·구 체제로 갈라져 보·혁 갈등을 빚을 때, 김지미가 이사장이었던 한국 야마토게임하기 영화인협회에 맞선 ‘충무로 포럼’의 핵심 인물이었다. 안성기가 홀 쪽의 문성근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이리 와.” 문이 어색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오자 김지미와 노장들이 슬며시 자리를 열어 줬다. 이 장면은 안성기의 넓은 품과 함께 영화계 보·혁 갈등의 여진(餘震)을 느끼게 해줬다.
릴게임갓김지미가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후배들과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문소리, 강수연, 김지미, 장미희, 예지원. 자료 사진
◇ “협회장 맡아달라는 요청에…”
김지미는 한국 영화사를 빛낸 스타 배우였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해 1992년까지 연 릴게임예시 기활동을 했다. 출연작으로 363편이 확인됐는데, 유실된 필름을 고려하면 700여 편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빼어난 외모로 각광을 받았으나, 점차 캐릭터를 지배하는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화계에서 “도도하다” “통이 크고 인정이 많다”라는 평을 함께 들었다. 40대에 접어든 1980년대에 지미필름을 설립해 영화제작자로 나섰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분단의 골드몽릴게임 아픔과 사회의 그늘을 다룬 걸작 ‘길소뜸’, ‘티켓’을 만들었다.
김지미가 보·혁 갈등의 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19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을 때부터였다. 당시 영화계는 저질 상업영화의 범람, 대종상 불공정 시비, 업자 부패·탈세 등으로 내부가 곪아 있었다. 밖으로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상영 의무) 축소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던 영화인들이 찾아와 “협회를 맡아 업계 정화도 시키고 대외 간판이 돼 달라”고 수차례 청하자, 김지미는 “팬들 사랑에 대한 빚을 갚자”라는 마음으로 응했다.
이사장이 된 후 그는 여장부라는 별칭답게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로 협회 내홍을 다스리는 한편, 밖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 나섰다. 그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 문제와 관련, “국가 차원에서 정해졌으니 시장 개방은 해 주되 받아낼 것을 받아내서 우리 영화를 육성시키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속내를 표출하지 않았다. ‘외세 앞에서 우리 영화를 지키자’라는 영화운동 진영의 구호가 워낙 거셌던 탓이다.
영화운동 주도 세력은 직배, 스크린쿼터 문제를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침탈’로 봤다. 이는 그들이 1980년대 대학가 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운동권은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 혹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직배,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 영토를 미제(美帝)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영화운동 진영은 밖으로 ‘문화침탈’에 맞서는 한편, 안으론 ‘충무로 구체제’와 대립했다. 1994년 대종상 선정회의는 신·구 세대 대립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혁신을 내건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구세대 위원들이 내정한 수상작들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협회를 맡은 김지미는 협회 안에 스크린쿼터 감시단 사무실을 마련해줬다. 이른바 신·구 세대 공존을 꾀한 셈이다. 영화운동 진영의 핵심 이론가 김혜준 등이 감시단을 꾸렸다. 그런데 그들이 감시 활동을 넘어서 검열철폐 성명 등에 나서자, 김지미는 협회가 반정부 활동을 지원할 수 없다며 사무실을 폐쇄했다.
김지미가 2019년 부산영화제에서 안성기(오른쪽) 배우와 함께 관객들과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 자료 사진
◇ DJ 지지한 김지미의 소신
영화운동 진영은 19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정지영 감독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지미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충무로 포럼’을 만들어 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배우 문성근이 대표였고, 기획자 유인택과 배우 명계남, 김혜준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곧 영화인협회에 맞설 새 조직으로 ‘한국영화인회의’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를 새로 출범시키며 그 위원장에 신세길 전 삼성물산 구주그룹 대표, 부위원장에 문성근 배우를 선임했다. 영화인협회 이사장인 김지미,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윤일봉 배우는 위원이었다. 이에 영화인협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위원 선임과 발족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신세길-문성근 체제는 무산됐고, 이에 따라 혁신 성향 위원들이 사퇴했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계 혁신 세력과 밀착돼 있었으나 김지미를 홀대하진 못했다. 그가 1970년 대선 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까닭이었다. 김지미는 시민이자 배우로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어떤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권력의 정계 입문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의 김대중 지지는 ‘거래’를 낳았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했고, 김지미는 지원 대가로 영진위 기금 2800억 원을 요구해 받아냈다. 물론 이는 사익이 아니라 영화계 발전을 위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배우 정체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앞에 언급했던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영화인회의를 만들어 기존 협회를 무력화한 문성근·명계남 등에 대해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영화 역사를 지켜온 선배들을 구세대라며 몰아내고, 혁명군의 기세로 정치 진영의 한쪽을 떠받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걔네들을 보게 되면, 잘하라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이후 영화계는 영화인회의 세력이 이끌었다. 이들이 관련 기관과 각종 영화제 등을 장악했다. 간혹 보수 우파진영에서 반격에 나섰지만 큰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부산영화제 뒤풀이 등에서 영화인들끼리 ‘빨갱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고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말은 우리 시대 문화인의 처지를 ‘웃프게’ 대변한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다.”
충무로 구체제 인물 중 하나인 정진우 감독도 ‘양파’를 자처했다. 그는 혁신세력 핵심이었던 이용관 중앙대 교수가 부산영화제 위원장에서 축출됐다가 복귀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 정치권력이 영화계에 간섭할 땐 좌·우 진영을 떠나서 함께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였다.
정진우 감독은 2019년 잠시 귀국한 김지미와 이용관 위원장, 그리고 역시 혁신세력 중심이었던 주진숙 영상자료원장 등을 함께 불러 화해의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를 계기로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가 열렸다. 김지미는 이때 부산 영진위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공정환경센터장으로 일하는 김혜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내가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20여 년 전 자신을 공격했던 젊은 운동가를 기억했던 것이다. 이때 김혜준은 김지미를 와락 껴안았다.
이날의 포옹으로 과거의 대립을 다 지울 수는 없지만, 서로를 더 미워하지 말자는 상징적 제스처의 의미는 컸다. 20세기 말에 젊음을 무기로 혁신의 깃발을 들었던 인물들이 이제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앓는 중견·노장이 됐다. 그동안 영화운동 진영의 타도 대상이었던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K-무비가 눈이 부시게 성장했다. 스크린쿼터라는 말은 영화사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정도로 영화계는 급변했다. 넷플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식민’이 안 되고 ‘주군’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도 우리가 세계 최빈국일 때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영화 예술을 일군 이들의 노력과 열정은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창립위원장은 책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영화의 연대기는 한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심하여 이루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합니다.”
‘리즈 테일러’ 수식어 비교말라했지만 닮아 김지미의 자존심과 결혼생활
< “리즈 테일러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다.”/ 명자(明子)라는 일본 이름으로 태어나/ 17세 때부터 대한민국 여배우 지미(芝美)로 살아온 그가/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를 모태로 세상에 나온 700편의 영화도/ 어느 하나 숨으려 하지 않고/ 환한 빛 속에 제각기 당당했다.>
지난 2010년 김지미 배우를 만난 후 이런 메모를 했다. 그의 드높은 자부심에 매혹됐다고나 할까.
김지미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때 배우가 됐다. 그를 설득해 영화에 입문시킨 김기영 감독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났다.
김지미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으나, 리즈 테일러(1932∼2011)와 여러모로 닮았다. 리즈는 오드리 헵번, 내털리 우드가 청순미로 인기를 끌 때 자신만의 완숙미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지미도 최은희를 비롯한 선배들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하며 독특한 매력을 과시했다. 예명 ‘지미’의 뜻대로 난초 같은 청초함의 대명사였는가 하면 올차고 오만하며 때로 비애가 감도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영화에서는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가정적으론 수차례 파경을 겪은 것도 리즈 테일러와 닮았다. 18세 때 16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헤어졌다. 1963년 기혼인 최무룡과 결합하며 그의 전처에게 위자료를 직접 챙겨 줬는데, 6년 후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결별했다. 30대의 김지미는 7세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귀며 동거했는데, 그 기간은 7년을 넘지 않았다. 51세 때 심장 전문의인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11년 뒤 이혼했다. 김지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여성은 모성 본능으로 남자를 감싸주고 싶어하는데….”
그는 말년의 23년을 네 형제와 두 딸(홍경임, 최영숙)이 있는 미국 LA에서 살았다. “손자들이 크는 걸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게 참 좋아요.” 화려한 스타가 아닌 평범한 할머니의 기쁨을 누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재선 기자
최근 타계한 김지미(1940∼2025), 안성기(1950∼2026) 배우를 한자리에서 본 적이 있다. 지난 2010년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은퇴 파티에서였다. 이날 기념 촬영을 할 때 안성기 배우가 골드몽게임 김지미, 신성일 등 선배들을 단상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지미는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으로 와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붐비는 홀에서 문성근이 홀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1990년대에 영화계가 신·구 체제로 갈라져 보·혁 갈등을 빚을 때, 김지미가 이사장이었던 한국 야마토게임하기 영화인협회에 맞선 ‘충무로 포럼’의 핵심 인물이었다. 안성기가 홀 쪽의 문성근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이리 와.” 문이 어색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오자 김지미와 노장들이 슬며시 자리를 열어 줬다. 이 장면은 안성기의 넓은 품과 함께 영화계 보·혁 갈등의 여진(餘震)을 느끼게 해줬다.
릴게임갓김지미가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후배들과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문소리, 강수연, 김지미, 장미희, 예지원. 자료 사진
◇ “협회장 맡아달라는 요청에…”
김지미는 한국 영화사를 빛낸 스타 배우였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해 1992년까지 연 릴게임예시 기활동을 했다. 출연작으로 363편이 확인됐는데, 유실된 필름을 고려하면 700여 편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빼어난 외모로 각광을 받았으나, 점차 캐릭터를 지배하는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화계에서 “도도하다” “통이 크고 인정이 많다”라는 평을 함께 들었다. 40대에 접어든 1980년대에 지미필름을 설립해 영화제작자로 나섰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분단의 골드몽릴게임 아픔과 사회의 그늘을 다룬 걸작 ‘길소뜸’, ‘티켓’을 만들었다.
김지미가 보·혁 갈등의 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19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을 때부터였다. 당시 영화계는 저질 상업영화의 범람, 대종상 불공정 시비, 업자 부패·탈세 등으로 내부가 곪아 있었다. 밖으로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상영 의무) 축소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던 영화인들이 찾아와 “협회를 맡아 업계 정화도 시키고 대외 간판이 돼 달라”고 수차례 청하자, 김지미는 “팬들 사랑에 대한 빚을 갚자”라는 마음으로 응했다.
이사장이 된 후 그는 여장부라는 별칭답게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로 협회 내홍을 다스리는 한편, 밖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 나섰다. 그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 문제와 관련, “국가 차원에서 정해졌으니 시장 개방은 해 주되 받아낼 것을 받아내서 우리 영화를 육성시키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속내를 표출하지 않았다. ‘외세 앞에서 우리 영화를 지키자’라는 영화운동 진영의 구호가 워낙 거셌던 탓이다.
영화운동 주도 세력은 직배, 스크린쿼터 문제를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침탈’로 봤다. 이는 그들이 1980년대 대학가 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운동권은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 혹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직배,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 영토를 미제(美帝)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영화운동 진영은 밖으로 ‘문화침탈’에 맞서는 한편, 안으론 ‘충무로 구체제’와 대립했다. 1994년 대종상 선정회의는 신·구 세대 대립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혁신을 내건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구세대 위원들이 내정한 수상작들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협회를 맡은 김지미는 협회 안에 스크린쿼터 감시단 사무실을 마련해줬다. 이른바 신·구 세대 공존을 꾀한 셈이다. 영화운동 진영의 핵심 이론가 김혜준 등이 감시단을 꾸렸다. 그런데 그들이 감시 활동을 넘어서 검열철폐 성명 등에 나서자, 김지미는 협회가 반정부 활동을 지원할 수 없다며 사무실을 폐쇄했다.
김지미가 2019년 부산영화제에서 안성기(오른쪽) 배우와 함께 관객들과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 자료 사진
◇ DJ 지지한 김지미의 소신
영화운동 진영은 19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정지영 감독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지미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충무로 포럼’을 만들어 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배우 문성근이 대표였고, 기획자 유인택과 배우 명계남, 김혜준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곧 영화인협회에 맞설 새 조직으로 ‘한국영화인회의’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를 새로 출범시키며 그 위원장에 신세길 전 삼성물산 구주그룹 대표, 부위원장에 문성근 배우를 선임했다. 영화인협회 이사장인 김지미,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윤일봉 배우는 위원이었다. 이에 영화인협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위원 선임과 발족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신세길-문성근 체제는 무산됐고, 이에 따라 혁신 성향 위원들이 사퇴했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계 혁신 세력과 밀착돼 있었으나 김지미를 홀대하진 못했다. 그가 1970년 대선 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까닭이었다. 김지미는 시민이자 배우로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어떤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권력의 정계 입문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의 김대중 지지는 ‘거래’를 낳았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했고, 김지미는 지원 대가로 영진위 기금 2800억 원을 요구해 받아냈다. 물론 이는 사익이 아니라 영화계 발전을 위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배우 정체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앞에 언급했던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영화인회의를 만들어 기존 협회를 무력화한 문성근·명계남 등에 대해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영화 역사를 지켜온 선배들을 구세대라며 몰아내고, 혁명군의 기세로 정치 진영의 한쪽을 떠받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걔네들을 보게 되면, 잘하라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이후 영화계는 영화인회의 세력이 이끌었다. 이들이 관련 기관과 각종 영화제 등을 장악했다. 간혹 보수 우파진영에서 반격에 나섰지만 큰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부산영화제 뒤풀이 등에서 영화인들끼리 ‘빨갱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고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말은 우리 시대 문화인의 처지를 ‘웃프게’ 대변한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다.”
충무로 구체제 인물 중 하나인 정진우 감독도 ‘양파’를 자처했다. 그는 혁신세력 핵심이었던 이용관 중앙대 교수가 부산영화제 위원장에서 축출됐다가 복귀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 정치권력이 영화계에 간섭할 땐 좌·우 진영을 떠나서 함께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였다.
정진우 감독은 2019년 잠시 귀국한 김지미와 이용관 위원장, 그리고 역시 혁신세력 중심이었던 주진숙 영상자료원장 등을 함께 불러 화해의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를 계기로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가 열렸다. 김지미는 이때 부산 영진위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공정환경센터장으로 일하는 김혜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내가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20여 년 전 자신을 공격했던 젊은 운동가를 기억했던 것이다. 이때 김혜준은 김지미를 와락 껴안았다.
이날의 포옹으로 과거의 대립을 다 지울 수는 없지만, 서로를 더 미워하지 말자는 상징적 제스처의 의미는 컸다. 20세기 말에 젊음을 무기로 혁신의 깃발을 들었던 인물들이 이제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앓는 중견·노장이 됐다. 그동안 영화운동 진영의 타도 대상이었던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K-무비가 눈이 부시게 성장했다. 스크린쿼터라는 말은 영화사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정도로 영화계는 급변했다. 넷플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식민’이 안 되고 ‘주군’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도 우리가 세계 최빈국일 때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영화 예술을 일군 이들의 노력과 열정은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창립위원장은 책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영화의 연대기는 한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심하여 이루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합니다.”
‘리즈 테일러’ 수식어 비교말라했지만 닮아 김지미의 자존심과 결혼생활
< “리즈 테일러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다.”/ 명자(明子)라는 일본 이름으로 태어나/ 17세 때부터 대한민국 여배우 지미(芝美)로 살아온 그가/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를 모태로 세상에 나온 700편의 영화도/ 어느 하나 숨으려 하지 않고/ 환한 빛 속에 제각기 당당했다.>
지난 2010년 김지미 배우를 만난 후 이런 메모를 했다. 그의 드높은 자부심에 매혹됐다고나 할까.
김지미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때 배우가 됐다. 그를 설득해 영화에 입문시킨 김기영 감독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났다.
김지미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으나, 리즈 테일러(1932∼2011)와 여러모로 닮았다. 리즈는 오드리 헵번, 내털리 우드가 청순미로 인기를 끌 때 자신만의 완숙미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지미도 최은희를 비롯한 선배들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하며 독특한 매력을 과시했다. 예명 ‘지미’의 뜻대로 난초 같은 청초함의 대명사였는가 하면 올차고 오만하며 때로 비애가 감도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영화에서는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가정적으론 수차례 파경을 겪은 것도 리즈 테일러와 닮았다. 18세 때 16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헤어졌다. 1963년 기혼인 최무룡과 결합하며 그의 전처에게 위자료를 직접 챙겨 줬는데, 6년 후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결별했다. 30대의 김지미는 7세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귀며 동거했는데, 그 기간은 7년을 넘지 않았다. 51세 때 심장 전문의인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11년 뒤 이혼했다. 김지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여성은 모성 본능으로 남자를 감싸주고 싶어하는데….”
그는 말년의 23년을 네 형제와 두 딸(홍경임, 최영숙)이 있는 미국 LA에서 살았다. “손자들이 크는 걸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게 참 좋아요.” 화려한 스타가 아닌 평범한 할머니의 기쁨을 누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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