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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하나”… 만해 독립 의지 깃든 사찰 속으로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시 ‘사랑하는 까닭’ 중)
▲ 건봉사 입구에 위치한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사진 왼쪽).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의 모습.
모바일릴게임
만해 한용운은 1907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했다. 일본 유학 후 이듬해 9월 귀국해 건봉사 이학사에게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학했다. 당대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고 그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곳이 바로 고성 건봉사였다.
릴게임손오공
그의 삶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건봉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건봉사는 조선시대 해인사·송광사 통도사와 함께 전국 4대 사찰로 꼽힐 만큼 번성했다. 그곳에서 만해는 독립을 위한 꿈을 꿨다. 일찍이 사명대사가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한 승군을 길러내고, 조선말 왜군에 의해 갈취당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를 다시 봉환한 호국 불교 바다이야기모바일 의 성지였다. 건봉사는 1906년 불교 근대화에 앞장서며 근대 교육기관인 봉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만해는 건봉사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 근간을 세웠다. 한용운의 생애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조선불교유신론’이 쓰인 1910년 이전 활동이다. 그가 1899년 집을 떠나 전전하다 1905년 출가한 점을 살펴볼 때, ‘조선 릴게임하는법 불교유신론’에 담긴 개혁 사상과 불교에 대한 이해는 10여 년에 걸친 시기의 활동과 교류 관계에 영향받았을 것이다. 만해는 출가한 이후 건봉사와 백담사, 오세암 등 설악권의 사찰을 오가며 사색했다. 그 결과물이 근대 불교를 정립한 ‘조선불교유신론’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규모가 컸던 건봉사의 근대적인 학풍과 항일운동의 전통은 만해의 관점에 변화의 씨앗을 심었 바다이야기디시 을 것이다.
▲ 건봉사 입구에 위치한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사진 왼쪽).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의 모습.
설악의 가장 윗줄기이자 금강산으로 향하는 통로인 건봉사를 찾았다. 1월의 절반을 통과하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의 먼지를 털며 한용운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건봉사의 입구에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었다. 고성군이 운영하는 기념관은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아 문이 닫혀 있었지만, 한용운의 시를 조우할 수 있었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시비와 함께 건봉사 승려 출신인 조영출의 ‘칡넝쿨’ 시비가 나란히 놓여 길손의 방문을 환영했다.
건봉사에서 불타지 않은 유일한 일주문인 ‘불이문’을 마주했다. 강원도 문화유산자료이기도 한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됐다. ‘해탈의 문’이라고도 불리며,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한다.
만해 한용운도 수행의 길을 위해 건봉사에 다다랐을 것이다. 만해의 마음처럼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한 길을 걸었다. 대웅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능파교’를 건너야만 했다. ‘능파’는 가볍고 우아한 아름다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한다.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해탈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건너며, 만해가 품었을 불심에 대해 생각했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만해는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막막하고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중생의 마음으로 만해를 이해하고 싶었다.
금강산 건봉사는 불교의 성지로 이어져 왔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불교 화엄경의 금강(金剛)에서 유래했다. 금강은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금강산의 빼어난 자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시대의 역사에서 건봉사는 상흔을 입기도 했지만, 금강의 마음으로 매번 꿋꿋이 일어섰다.
건봉사의 장소성과 만해에 대해 알기 위해 건봉사에서 수행하는 한 스님을 만났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기자의 방문에도 스님은 따스한 차를 내어주었다. 자신은 이야기를 할 뿐 드러나고 싶지 않다며 익명을 요청했다.
“기록에 담지 못한 신성성이 금강산 건봉사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경덕왕 17년(758년)에 발징화상이 원각사를 중건했고, 서봉사라는 이름을 지녔다가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건봉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조선시대 원당사찰로 지정돼 왕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부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인 ‘적멸보궁’이기도 한 건봉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3183칸을 가지고 있을 만큼 번성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침입하자 사명대사는 건봉사에서 처음으로 승병을 모아 궐기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 빼앗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다시 모셨다.
진신치아사리는 스리랑카 캔시시(3과)와 건봉사(8과)에만 봉안돼 있다. 건봉사 진신치아사리는 1986년 도굴꾼들에게 12과를 도난당했다가 8과를 되찾기도 했다. 이에 건봉사는 사리를 수호하는 보안보살을 모신 보안원에 진신치아사리 5과를 이운해, 직접 친견을 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3과는 건봉사 적멸보궁에 있다.
스님은 “당시 치아사리를 훔쳐간 행동책이 사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꿈을 꿔 다시 8개를 절에 돌려주기도 한 영험함이 있다”면서 “사리를 직접 눈으로 매일 친견할 수 있게 해놓은 곳은 세계적으로 건봉사밖에 없다”고 말했다.
건봉사는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지역의 중심 사찰인 ‘31본산’이었다. 백담사는 현재 신흥사의 말사로 되어 있지만 한용운이 활동할 당시만 해도 백담사는 건봉사의 말사로, 건봉사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한용운은 1928년 건봉사 사지인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을 편찬했다. 1878년 건봉사 화재로 인해 사찰 자료가 소실되자 부족한 기록을 보완하여 갖추기 위해 만든 사적기다. 편년체로 각 사찰의 연혁을 적고 부속 암자와 재산 등을 기술했다. 연대 표기는 불기를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의 다른 사지들과는 달리 일본식 연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일본군과 항쟁한 기록은 당국의 검열로 실리지 못했다.
건봉사는 ‘염불 도량’으로 조선시대 4대 도량으로 꼽혔다. 신라시대 발징화상이 758년 원각사를 중수하고 27년 5개월(1만일)동안 염불을 외우는 법회를 봉행했다. 1만일째 되는 날 회향할 때 기도에 참여했던 스님 31명이 극락왕생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때 기도에 동참했던 신도 1820명도 여생을 편하게 살다가 극락왕생에 이르렀다. 다만 1만일 째 되는 날 마지막 회향을 했던 장소인 등공대는 건봉사 뒤편 민간인 통제구역 산길에 있어 쉽게 갈 수 없다. DMZ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10명 이상의 단체 관람만 가능하며 일반인 자유 출입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옛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렸다.
▲ 건봉사 능파교의 모습. ‘능파’는 아름답고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다.
건봉사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폐허가 됐다. 건봉사는 6·25 이전에는 북한 영역에 속해 있었고 민통선 안쪽에 있어 1988년까지는 민간인 출입도 제한됐다. 출입 제한은 1989년이 되어서야 풀렸다.
스님은 “불교는 500년 동안 탄핵을 받아도 꾸준하게 이어져 오는 정신이 있다”면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인 것처럼 당신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했다.
스님의 말을 듣고 지옥에 갈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전각 ‘명부전’을 찾았다. 1000개가 넘는 순국한 군인들의 위패가 있었다. ‘불이문’을 통해 다시 속세의 길을 걸었다. 불이문 옆 500년된 팽나무를 마주했다. 전쟁이 건봉사를 삼켰지만 팽나무가 불이문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져 내려와, 상징목으로 보호수로 지정됐다.
처음 절에 들어갔을 때와는 다른 경건함이 보였다. 만해의 시 ‘사랑하는 까닭’이 다시 보였다. 만해는 평생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였다. 한 인간으로서 두려웠겠지만, 화재를 겪은 건봉사가 재건을 거친 것처럼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만해가 건봉사에 와서 한 모든 일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채윤 기자
#건봉사 #만해 #한용운 #사찰 #불교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시 ‘사랑하는 까닭’ 중)
▲ 건봉사 입구에 위치한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사진 왼쪽).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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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1907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했다. 일본 유학 후 이듬해 9월 귀국해 건봉사 이학사에게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학했다. 당대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고 그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곳이 바로 고성 건봉사였다.
릴게임손오공
그의 삶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건봉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건봉사는 조선시대 해인사·송광사 통도사와 함께 전국 4대 사찰로 꼽힐 만큼 번성했다. 그곳에서 만해는 독립을 위한 꿈을 꿨다. 일찍이 사명대사가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한 승군을 길러내고, 조선말 왜군에 의해 갈취당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를 다시 봉환한 호국 불교 바다이야기모바일 의 성지였다. 건봉사는 1906년 불교 근대화에 앞장서며 근대 교육기관인 봉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만해는 건봉사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 근간을 세웠다. 한용운의 생애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조선불교유신론’이 쓰인 1910년 이전 활동이다. 그가 1899년 집을 떠나 전전하다 1905년 출가한 점을 살펴볼 때, ‘조선 릴게임하는법 불교유신론’에 담긴 개혁 사상과 불교에 대한 이해는 10여 년에 걸친 시기의 활동과 교류 관계에 영향받았을 것이다. 만해는 출가한 이후 건봉사와 백담사, 오세암 등 설악권의 사찰을 오가며 사색했다. 그 결과물이 근대 불교를 정립한 ‘조선불교유신론’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규모가 컸던 건봉사의 근대적인 학풍과 항일운동의 전통은 만해의 관점에 변화의 씨앗을 심었 바다이야기디시 을 것이다.
▲ 건봉사 입구에 위치한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사진 왼쪽).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의 모습.
설악의 가장 윗줄기이자 금강산으로 향하는 통로인 건봉사를 찾았다. 1월의 절반을 통과하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의 먼지를 털며 한용운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건봉사의 입구에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었다. 고성군이 운영하는 기념관은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아 문이 닫혀 있었지만, 한용운의 시를 조우할 수 있었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시비와 함께 건봉사 승려 출신인 조영출의 ‘칡넝쿨’ 시비가 나란히 놓여 길손의 방문을 환영했다.
건봉사에서 불타지 않은 유일한 일주문인 ‘불이문’을 마주했다. 강원도 문화유산자료이기도 한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됐다. ‘해탈의 문’이라고도 불리며,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한다.
만해 한용운도 수행의 길을 위해 건봉사에 다다랐을 것이다. 만해의 마음처럼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한 길을 걸었다. 대웅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능파교’를 건너야만 했다. ‘능파’는 가볍고 우아한 아름다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한다.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해탈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건너며, 만해가 품었을 불심에 대해 생각했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만해는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막막하고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중생의 마음으로 만해를 이해하고 싶었다.
금강산 건봉사는 불교의 성지로 이어져 왔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불교 화엄경의 금강(金剛)에서 유래했다. 금강은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금강산의 빼어난 자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시대의 역사에서 건봉사는 상흔을 입기도 했지만, 금강의 마음으로 매번 꿋꿋이 일어섰다.
건봉사의 장소성과 만해에 대해 알기 위해 건봉사에서 수행하는 한 스님을 만났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기자의 방문에도 스님은 따스한 차를 내어주었다. 자신은 이야기를 할 뿐 드러나고 싶지 않다며 익명을 요청했다.
“기록에 담지 못한 신성성이 금강산 건봉사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경덕왕 17년(758년)에 발징화상이 원각사를 중건했고, 서봉사라는 이름을 지녔다가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건봉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조선시대 원당사찰로 지정돼 왕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부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인 ‘적멸보궁’이기도 한 건봉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3183칸을 가지고 있을 만큼 번성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침입하자 사명대사는 건봉사에서 처음으로 승병을 모아 궐기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 빼앗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다시 모셨다.
진신치아사리는 스리랑카 캔시시(3과)와 건봉사(8과)에만 봉안돼 있다. 건봉사 진신치아사리는 1986년 도굴꾼들에게 12과를 도난당했다가 8과를 되찾기도 했다. 이에 건봉사는 사리를 수호하는 보안보살을 모신 보안원에 진신치아사리 5과를 이운해, 직접 친견을 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3과는 건봉사 적멸보궁에 있다.
스님은 “당시 치아사리를 훔쳐간 행동책이 사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꿈을 꿔 다시 8개를 절에 돌려주기도 한 영험함이 있다”면서 “사리를 직접 눈으로 매일 친견할 수 있게 해놓은 곳은 세계적으로 건봉사밖에 없다”고 말했다.
건봉사는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지역의 중심 사찰인 ‘31본산’이었다. 백담사는 현재 신흥사의 말사로 되어 있지만 한용운이 활동할 당시만 해도 백담사는 건봉사의 말사로, 건봉사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한용운은 1928년 건봉사 사지인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을 편찬했다. 1878년 건봉사 화재로 인해 사찰 자료가 소실되자 부족한 기록을 보완하여 갖추기 위해 만든 사적기다. 편년체로 각 사찰의 연혁을 적고 부속 암자와 재산 등을 기술했다. 연대 표기는 불기를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의 다른 사지들과는 달리 일본식 연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일본군과 항쟁한 기록은 당국의 검열로 실리지 못했다.
건봉사는 ‘염불 도량’으로 조선시대 4대 도량으로 꼽혔다. 신라시대 발징화상이 758년 원각사를 중수하고 27년 5개월(1만일)동안 염불을 외우는 법회를 봉행했다. 1만일째 되는 날 회향할 때 기도에 참여했던 스님 31명이 극락왕생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때 기도에 동참했던 신도 1820명도 여생을 편하게 살다가 극락왕생에 이르렀다. 다만 1만일 째 되는 날 마지막 회향을 했던 장소인 등공대는 건봉사 뒤편 민간인 통제구역 산길에 있어 쉽게 갈 수 없다. DMZ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10명 이상의 단체 관람만 가능하며 일반인 자유 출입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옛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렸다.
▲ 건봉사 능파교의 모습. ‘능파’는 아름답고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다.
건봉사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폐허가 됐다. 건봉사는 6·25 이전에는 북한 영역에 속해 있었고 민통선 안쪽에 있어 1988년까지는 민간인 출입도 제한됐다. 출입 제한은 1989년이 되어서야 풀렸다.
스님은 “불교는 500년 동안 탄핵을 받아도 꾸준하게 이어져 오는 정신이 있다”면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인 것처럼 당신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했다.
스님의 말을 듣고 지옥에 갈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전각 ‘명부전’을 찾았다. 1000개가 넘는 순국한 군인들의 위패가 있었다. ‘불이문’을 통해 다시 속세의 길을 걸었다. 불이문 옆 500년된 팽나무를 마주했다. 전쟁이 건봉사를 삼켰지만 팽나무가 불이문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져 내려와, 상징목으로 보호수로 지정됐다.
처음 절에 들어갔을 때와는 다른 경건함이 보였다. 만해의 시 ‘사랑하는 까닭’이 다시 보였다. 만해는 평생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였다. 한 인간으로서 두려웠겠지만, 화재를 겪은 건봉사가 재건을 거친 것처럼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만해가 건봉사에 와서 한 모든 일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채윤 기자
#건봉사 #만해 #한용운 #사찰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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