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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면서/ 천리 먼 길 애틋함을 함께 부쳤네/ 흘러간 세월에 붉은빛 다 바래서/ 만년의 서글픔 가눌 수가 없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 자식 일깨우는 글을 적으니 (…)”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앞에 실린 오언시의 부분이다. 하(霞)는 노을이고, 피(帔)는 치마다. 당나라 때 신부가 입던 예복을 ‘하피’라 했다. 1810년 다산의 전남 강진 유배 시절, 부인이 책과 옷가지를 챙겨 보내면서, 시집올 때 입은 명주 치마를 함께 보냈다. 다산은 1776년 15살에 한살 위인 풍산 홍씨와 혼인했으니, 다홍이 노을로 색 바랜 세월이 34년이다. 가지 못하는 마음을 고이 접어 보낸 부상따차트
인의 손길, 낡은 치마 속에 다 가시지 않은 온기가 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거두고 보시오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 녀기소서’ 이 대목, 홍랑의 시 한수 아니 붙을 수 없다. 연모는 한 쌍의 표주박처럼 하나가 둘이다. 치마에 실려 가는 마음도 간절하거니와, 다홍빛에서 ‘애틋함’을, 노을빛에서 증권계좌계설
‘서글픔’을 읽어내는 다산의 헤아림도 애절하다.
치마를 마름질하여 배접하고, 학문과 처세와 지혜에 관하여,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었다. 천 조각이 한정된 것이어서 얼마나 정성 들여 썼는지, 유배 시절의 대표적 필체로 꼽힌다. 3권의 첩, 쫙 펴면 작은 병풍이 된다. 후손이 간직하고 있던 것을 전쟁 통에 피란 가다가 수원역에서 잃어버렸다.2011유망주

“2006년 4월2일, 잊지 못해요. ‘티브이(TV)쇼 진품명품’ 앞으로 사진 의뢰가 왔는데 깜짝 놀랐지요. 딱 보니 다산 친필이라. 말로만 듣던 하피첩, 방송하면서 제일 기뻤던 날 아닌가 싶어요. 꼭 내가 찾아낸 것처럼,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옵니다.”
서울 인사동 문우서림 대표, ‘진품명품’ 감정위원 김영복, 195주식거래소
3년 강원도 원주생이다. 지광국사 탑으로 유명한 법천사지가 탯자리다. 어릴 때 납광을 하던 조부 밑에서 한자를 배웠다. 17살에 상경하여 중동고 야간을 다녔다. 주먹으로 종로를 휩쓸던 학교인데 이곳에 권중구 선생이 있었다. 유도 7단이면서 1970년대 교재로 유명한 ‘한문대강’(漢文大綱)을 쓴 한문 교사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인사동 원일특강 주식
통문관에서 아르바이트를 뽑는다는 거라. 애들 여럿이 손을 들어서 한문 시험을 봤어요. 거기서 내가 1등 했지. 낮에 일하고 저녁에 학교 가는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연이 평생 업이 될지 그때는 몰랐지요.”
통문관은 고려 때 문서를 번역하던 관청인데, 책이 머물렀다 가는 고서점 이름으로 잘 어울린다. 이겸로 선생이 1934년 일본인이 운영하던 것을 매입, 개업한 이후 손자로 이어진 우리나라 최고의 서점이다.
“오랜 세월 쌓인 책이 수만권인데다 고서가 날마다 들어와요. 설 무렵이나 신학기 3월이 되면 돈 쓸 일이 많으니까 대목이거든.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쟁이는, 그것은 몸으로 하는 일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한눈에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입니다. 몸 일을 한 3년 하다 보니 눈이 실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대학은 포기했고, 고교 졸업 후에 저녁 시간이 남잖아요, 선생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한학과 필적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토요일이면 경북대 경남대 전주대 등 교수들이 상경하여 하루 자고, 이튿날 통문관으로 온다. 통문관은 학자들의 사랑방이었고, 어제 들어온 책이 오늘 팔려나갈 만큼 인사동은 성시를 이뤘다. 김영복은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이겸로 선생이 학비를 대줘 한문학자 이동환을 사사했다.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청명 임창순에게서는 초서를 배웠다. 지금은 더 없지만, 당시 ‘승정원일기’ 초서를 읽는 사람은 손에 꼽을 때다. 그렇게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고, 문리가 텄다.
어느 날 추사 대련(對聯)이 장에 나왔다. 시가보다 헐하다. 급히 추사 전문 원로에게 자문을 얻고는 300만원 주고 샀다. 지금 돈으로는 3천만원 정도. 월급 모아놓은 것을 탈탈 털었다. 되팔면 2배는 될 것이다. 드디어 거간으로 성장한 첫 거래의 기쁨!
그러나 가짜였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붙들고 원로에게 쫓아가 따져 물으니, “그때는 진짜같이 보이더라고…”라고 한다. 단골 식당에 걸어두었는데, 식당 주인이 좋아해서 술 한잔 값에 넘겨주고 말았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것이 있지요. 먼저 사람에게 배워라, 공부를 깊이 해라, 사람을 믿지 말고 작품을 믿어라. 고미술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나마 안목을 갖게 된 것은 그렇게 털린 뒤로 이를 악물고 공부한 덕분일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품이 위작은 아니고, 추사를 임모(臨模)한 제자 조희룡의 솜씨 같아요.”
하얀 페도라 모자에 쪽빛 정장, 구한말 모던보이 차림의 인사동 터줏대감, 독주를 좋아하는 그를 광화문 내자동에서 만나 밤 깊도록 얘기를 나눴다.
‘하피첩’ 의뢰인은 소도시 모텔을 리모델링해서 되파는 사람이었다. 벽지를 뜯어 마당에 내어놓았는데 파지 수집하는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와서는 달라고 한다. 가져가라 하다가 리어카 위를 보니 낡은 책 몇권이 뒹굴거리고 있다. 대신 그거나 주고 가라고 해서 받아 놓았다. 그것이 56년 만에 세상에 나온 ‘하피첩’이었다.
“감정가 1억원을 책정했지요. 그 양반이 귀갓길에 손이 떨려서 운전을 못했다고 합디다. 얼마 뒤에 팔아 달라 연락이 와서, 고서 수집가 김민영 선생이 소장했지요. 당시 김 선생은 이 물건은 내가 갖고 싶지만 유배지인 강진군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 하면서 그쪽에 연락했는데 다들 까막눈이라 놓치고 말았지. 한참 세월이 흘러 경매에 나왔는데, 민속박물관이 7억5천만원에 낙찰받았어요. 군수가 바뀐 강진군이 그제야 10억 원에라도 사겠다고 쑤시고 다녔지만 어디 흘러간 강물이 되돌아옵니까? 물각유주(物各有主)라, 물건에는 다 임자가 있다는 말인데, 세상살이의 절반은 물건이 주인을 찾아가는 그 길 속에 있는 거지요.”
그것이 상(商)이고, 나머지 절반은 학(學)인데, 그는 상과 학의 사이에서 살았다고 했다.
하루는 지방 출장 ‘진품명품’에 ‘논어’가 나왔다. 의뢰인이 시골 노부부인데, 임진왜란 이전 간행된 ‘임란전판’으로 네권이다. 제자(題字)를 퇴계 선생이 썼다고 나오고, 책 주인은 조목이라고 적혀있다.
“자세히 보니 퇴계 글씨가 맞아요. 그리고 월천 조목이 누굽니까? 퇴계의 문인으로 입신하지 않고 학문에 힘쓴, 그러면서 평생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라, 공문십철에 비할 수 있거든요. 내가 무릎을 쳤어요.” 혹시 도산서원에서 사제가 함께 공부하던 책은 아닐까, 퇴계는 논어의 훈석을 모으고 제자들과 문답을 채록한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는데, 그때 강독하던 교재는 아니었을까? 이야기는 또 이야기를 낳으면서 생명을 얻고 제 길을 간다.
‘진품명품’의 꽃은 값이다. 감정가는 학과 상의 결합이고, 이 대목이 제일 어렵다. 값을 매기려면 소장 내력도 중요한데 노부부는 아무리 봐도 ‘논어’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아마도 조목의 후손이었던 듯한데, 6·25전쟁 때 솔가해서 충청도 어디로 피란을 갔던가 봐요. 날은 저물어 의탁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갔던 거지. 그 난리 통에 집주인이 객을 받아 식구처럼 잘 보살펴줬나 봐요. 며칠 신세 지고 가면서 고마운데 줄 것은 없고, 피란길이니까 집안 가보 같은 것은 챙겨 갔겠지, 거기서 뽑아 준 책이 저 ‘논어’라, 그때 집주인 아들 내외가 저 노부부이고.”
인과가 저러하다. 60년 장롱에서 잠을 자다가 세상이 궁금하여 밖으로 나온 이 책, 2010년 무렵이다. 감정가는 이야기 값을 얹어 800만원 책정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산은 귀양이 풀려 귀향해서 살다가 1836년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육십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 한 쌍의 표주박을 (…)”
그의 마지막 시 ‘회혼시’(回婚詩)에 ‘하피’가 다시 나온다. ‘하피첩’은 2010년 보물로 지정됐다. 김영복은 인사동에 점원으로 첫발을 디딘 지 20여년이 흐른 1990년 고서점 ‘문우서림’을 차려 독립했다.



이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