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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대에 서니, 운해는 지리산 능선을 넘실거리며 계곡을 따라 폭포처럼 흘렀다. 숨 쉬는 일조차 잊을 만큼, 깊은 감동의 시간이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등뼈'로 불린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가장 굳센 선이자, 가장 높고 험한 능선의 상징이다. 하지만 남쪽 끝자락, 전북 남원 운봉에 이르면 그 백두대간은 잠시 어깨의 힘을 푼다. 능선은 낮아지고, 시야는 넓어지며, 길은 산에서 사람 곁으로 다가온다. 이곳이 바로 운봉 백두대간이다.
운봉 백두대간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일대, 해발 450~550m에 형성된 지리산국립공원 내 릴게임사이트 고원지대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평지를 허락한 곳이다. 분지 형태의 고원에는 논과 마을이 자리하고, 대간의 흐름은 급경사 대신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일대는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국가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운봉 백두대간에는 백두대간의 주요 길목인 정령치가 자리하고, 남원목기의 릴짱릴게임 본고장다운 생활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행정마을의 서어나무숲과 삼산마을의 노송군락지가 고원 풍경과 어우러지며, 자연과 사람이 오래 공존해 온 시간을 보여 준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도착지이자 2코스의 출발점으로, 산길과 마을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황금성릴게임 만복대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그 무엇도 없다. 드론은 그 열린 풍경을 그대로 담아 주었다.
운해폭포가 흐른 만복대의 아침
만복대는 정상에 올랐다는 느낌보다, 능선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먼저 찾아오는 산이다. 숲이 갑자기 열리고, 시야를 가로막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우주전함야마토게임 앞만 보던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 위에 서면 세상이 한꺼번에 열린다. 지리산의 주능선은 물론이고, 운봉 고원과 주변의 산자락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걷는 동안 쌓였던 숨과 마음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풀어진다. 만복대가 주는 감동은 높이가 아니라, 이 열림의 순간에 있다.
저녁 무렵, 잠깐 비가 지나갔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정령치가 바다이야기룰 지척인 운봉마을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복대 일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출 예정 시각은 오전 6시 10분.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췄다. 산에만 오면 눈은 늘 알람보다 먼저 떠진다.
정령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별이 총총했다. 일출은 어려울지 몰라도, 운해는 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정령치에서 만복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약 2km 남짓. 넉넉히 잡아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데다, 코스 난이도도 완만해 지리산 일출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길이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정령치 습지. 규모는 작지만 생태적 가치는 크다.
일출 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만복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아직 밤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 사이로 별이 반짝였고, 구름 사이로 여명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운해는 아직 천천히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조망 바위에 올랐다. 그 순간, 운해가 지리산 능선을 넘실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다. 이내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마치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운해가 흘러내리는 방향을 눈으로 따라갔다. 구름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떨어지고, 다시 다른 능선을 향해 몸을 풀었다. 붉은 여명은 곁에서 손짓하듯 번져갔다. 태양은 끝내 구름 속에 숨어 있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은 아침이었다.
숲과 바위 사이에 숨어 있듯 자리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기원전 1690년에 생성된 정령치 습지
그제야 만복대가 왜 '능선의 산'인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무엇 하나를 향해 오르지 않아도 된다. 서 있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높이의 끝이 아니라, 시야의 시작에 서 있는 느낌. 만복대는 정상을 내세우지 않고, 풍경을 먼저 내어준다.
구름 속에 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운해는 서서히 힘을 풀었다.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구름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숨 쉬는 일조차 잊을 만큼, 깊은 감동의 시간이었다. 자연 앞에서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서어나무숲의 나무들은 마을을 등지고 서서,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내어준다.
정령치 습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인근 해발 약 1,000m 고지에 형성된 고산습지로 정령치휴게소 주차장에서 걸어서 30여 분이 소요된다. 정령치 습지는 람사르Ramsar 습지로 지정된 고산습지로, 지리산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 이곳에서는 멈춰 선다. 완만한 지형과 점토질 토양 덕분에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고여 습지를 만들었고, 다양한 생명체를 키워내는 완벽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룬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690년에 생성된 것으로 알려진 정령치 습지는 그 시간의 깊이 또한 놀랍다.
이 습지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생태적 가치는 크다. 이끼류와 습지 식물, 곤충과 양서류들이 어우러져 살며 지리산 고산 생태계를 지탱하는 허파의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정령치 습지는 산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공간이다. 백두대간도 이곳에서는 쉬어간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노송들이 줄지어 서서,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삼산마을 노송군락지.
바위에 새겨진 열두 분의 부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습지로 가는 길은 잣나무숲이 이어졌다. 숲 바닥에는 잣송이가 뒹굴고 있었고, 초록의 숲길은 유난히 정겨웠다. 숲을 빠져 나오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 정령치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습지 가장자리에 놓인 설명문에는 산뚝마초와 고마리, 꽃창포 같은 식물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안내돼 있었다. 지리산의 어느 곳보다 공기가 맑게 느껴지는 청정한 공간이었다.
습지 가장자리에 잠시 앉아 쉬었다. 그저 숨을 고르고, 고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했다. 사람이 쉬어가듯, 이곳에서는 산도 쉬고 있었다.
정령치 습지에서 1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장면이 나타났다. 숲과 바위 사이에 숨어 있듯 자리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었다. 절벽을 이루는 자연 암반에 새겨진 열두 분의 부처님이었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이토록 조용히 마애불상군이 숨어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곳의 마애불과 마애보살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일대가 지리산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을 넘기 전, 혹은 넘고 난 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불상들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소박한 불상들은 바위의 결을 그대로 살려 새겨져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일부는 마모되고, 일부는 형태가 흐릿해졌다.
행정마을을 지켜온 서어나무 숲
열두 분을 모두 찾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바위 사이에 숨어 있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더듬으며 마주할수록,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참으로 인간적어서 이곳은 신앙의 공간이기 이전에 길 위의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던 자리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 숲 부분 대상을 차지한 서어나무 숲은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에 자리한 숲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200여 년 전 마을사람들이 직접 조성한 인공숲으로 화려한 명소라기보다 오랜 세월 마을과 함께 살아온 생활의 숲이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 있어서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쉼터가 된다.
약 500평 규모에 평균수령 200년 이상 된 서어나무 100여 그루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무들은 마을을 등지고 서서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내어준다. 사람들은 숲을 가꾸기보다 존중했고, 숲은 그 대가로 마을을 지켜왔다.
여름철 서어나무숲은 맥문동 꽃이 피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이가 그네 타던 모습이 촬영되었다.
삼산마을 노송군락지의 가을. 붉은 꽃무릇이 계절의 시간을 밝히고 있다.
곧음보다 버팀을 택한 노송군락지
숲에 들어서자 다른 세계로 발을 들인 듯했다. 소리가 먼저 낮아지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서어나무의 촘촘한 가지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마치 바깥세상과 마을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처럼 느껴졌다.
숲 주변에 조성된 데크길을 걸으며 서어나무숲이 주는 기운을 듬뿍 마셨다. 바람소리에 스치는 서어나무 잎들의 소리는 걷는 내내 잔잔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숲에서의 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운봉 고원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소나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삼산마을 노송군락지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노송들이 줄지어 서서 멋지게 곡선미를 자랑하는 와송숲이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들은 바람이 불어온 방향, 눈과 비를 맞아온 시간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숲은 자연 발화로 자란 나무들로 이뤄져 심은 사람은 기록조차 없다. 힘겨운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버텨온 이 숲의 소나무들을 연구하기 위해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고유식물종인 붉은병꽃나무를 포함해 총 220종의 야생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숲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췄다. 노송들은 키를 겨루듯 높이 자라기보다는 제각기 이리저리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휘어진 줄기들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뻗어가고 있었고, 거칠게 갈라진 껍질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나무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숲에서는 곧음보다 버팀이 먼저 느껴졌다.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서 아주 가까이에 노송군락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함께 둘러보기에 부담이 없었다. 부드러운 서어나무숲과 강인한 와송숲은 전혀 다른 숲이었지만 색다른 숲을 이어서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등뼈'로 불린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가장 굳센 선이자, 가장 높고 험한 능선의 상징이다. 하지만 남쪽 끝자락, 전북 남원 운봉에 이르면 그 백두대간은 잠시 어깨의 힘을 푼다. 능선은 낮아지고, 시야는 넓어지며, 길은 산에서 사람 곁으로 다가온다. 이곳이 바로 운봉 백두대간이다.
운봉 백두대간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일대, 해발 450~550m에 형성된 지리산국립공원 내 릴게임사이트 고원지대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평지를 허락한 곳이다. 분지 형태의 고원에는 논과 마을이 자리하고, 대간의 흐름은 급경사 대신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일대는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국가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운봉 백두대간에는 백두대간의 주요 길목인 정령치가 자리하고, 남원목기의 릴짱릴게임 본고장다운 생활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행정마을의 서어나무숲과 삼산마을의 노송군락지가 고원 풍경과 어우러지며, 자연과 사람이 오래 공존해 온 시간을 보여 준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도착지이자 2코스의 출발점으로, 산길과 마을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황금성릴게임 만복대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그 무엇도 없다. 드론은 그 열린 풍경을 그대로 담아 주었다.
운해폭포가 흐른 만복대의 아침
만복대는 정상에 올랐다는 느낌보다, 능선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먼저 찾아오는 산이다. 숲이 갑자기 열리고, 시야를 가로막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우주전함야마토게임 앞만 보던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 위에 서면 세상이 한꺼번에 열린다. 지리산의 주능선은 물론이고, 운봉 고원과 주변의 산자락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걷는 동안 쌓였던 숨과 마음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풀어진다. 만복대가 주는 감동은 높이가 아니라, 이 열림의 순간에 있다.
저녁 무렵, 잠깐 비가 지나갔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정령치가 바다이야기룰 지척인 운봉마을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복대 일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출 예정 시각은 오전 6시 10분.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췄다. 산에만 오면 눈은 늘 알람보다 먼저 떠진다.
정령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뜻밖에도 별이 총총했다. 일출은 어려울지 몰라도, 운해는 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정령치에서 만복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약 2km 남짓. 넉넉히 잡아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데다, 코스 난이도도 완만해 지리산 일출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길이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정령치 습지. 규모는 작지만 생태적 가치는 크다.
일출 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만복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아직 밤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 사이로 별이 반짝였고, 구름 사이로 여명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운해는 아직 천천히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조망 바위에 올랐다. 그 순간, 운해가 지리산 능선을 넘실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다. 이내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마치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운해가 흘러내리는 방향을 눈으로 따라갔다. 구름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떨어지고, 다시 다른 능선을 향해 몸을 풀었다. 붉은 여명은 곁에서 손짓하듯 번져갔다. 태양은 끝내 구름 속에 숨어 있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은 아침이었다.
숲과 바위 사이에 숨어 있듯 자리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기원전 1690년에 생성된 정령치 습지
그제야 만복대가 왜 '능선의 산'인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무엇 하나를 향해 오르지 않아도 된다. 서 있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높이의 끝이 아니라, 시야의 시작에 서 있는 느낌. 만복대는 정상을 내세우지 않고, 풍경을 먼저 내어준다.
구름 속에 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운해는 서서히 힘을 풀었다.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구름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숨 쉬는 일조차 잊을 만큼, 깊은 감동의 시간이었다. 자연 앞에서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서어나무숲의 나무들은 마을을 등지고 서서,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내어준다.
정령치 습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인근 해발 약 1,000m 고지에 형성된 고산습지로 정령치휴게소 주차장에서 걸어서 30여 분이 소요된다. 정령치 습지는 람사르Ramsar 습지로 지정된 고산습지로, 지리산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 이곳에서는 멈춰 선다. 완만한 지형과 점토질 토양 덕분에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고여 습지를 만들었고, 다양한 생명체를 키워내는 완벽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룬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690년에 생성된 것으로 알려진 정령치 습지는 그 시간의 깊이 또한 놀랍다.
이 습지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생태적 가치는 크다. 이끼류와 습지 식물, 곤충과 양서류들이 어우러져 살며 지리산 고산 생태계를 지탱하는 허파의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정령치 습지는 산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공간이다. 백두대간도 이곳에서는 쉬어간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노송들이 줄지어 서서,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삼산마을 노송군락지.
바위에 새겨진 열두 분의 부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습지로 가는 길은 잣나무숲이 이어졌다. 숲 바닥에는 잣송이가 뒹굴고 있었고, 초록의 숲길은 유난히 정겨웠다. 숲을 빠져 나오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 정령치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습지 가장자리에 놓인 설명문에는 산뚝마초와 고마리, 꽃창포 같은 식물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안내돼 있었다. 지리산의 어느 곳보다 공기가 맑게 느껴지는 청정한 공간이었다.
습지 가장자리에 잠시 앉아 쉬었다. 그저 숨을 고르고, 고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했다. 사람이 쉬어가듯, 이곳에서는 산도 쉬고 있었다.
정령치 습지에서 1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장면이 나타났다. 숲과 바위 사이에 숨어 있듯 자리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었다. 절벽을 이루는 자연 암반에 새겨진 열두 분의 부처님이었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이토록 조용히 마애불상군이 숨어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곳의 마애불과 마애보살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일대가 지리산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을 넘기 전, 혹은 넘고 난 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불상들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소박한 불상들은 바위의 결을 그대로 살려 새겨져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일부는 마모되고, 일부는 형태가 흐릿해졌다.
행정마을을 지켜온 서어나무 숲
열두 분을 모두 찾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바위 사이에 숨어 있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더듬으며 마주할수록,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참으로 인간적어서 이곳은 신앙의 공간이기 이전에 길 위의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던 자리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 숲 부분 대상을 차지한 서어나무 숲은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에 자리한 숲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200여 년 전 마을사람들이 직접 조성한 인공숲으로 화려한 명소라기보다 오랜 세월 마을과 함께 살아온 생활의 숲이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 있어서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쉼터가 된다.
약 500평 규모에 평균수령 200년 이상 된 서어나무 100여 그루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무들은 마을을 등지고 서서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내어준다. 사람들은 숲을 가꾸기보다 존중했고, 숲은 그 대가로 마을을 지켜왔다.
여름철 서어나무숲은 맥문동 꽃이 피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이가 그네 타던 모습이 촬영되었다.
삼산마을 노송군락지의 가을. 붉은 꽃무릇이 계절의 시간을 밝히고 있다.
곧음보다 버팀을 택한 노송군락지
숲에 들어서자 다른 세계로 발을 들인 듯했다. 소리가 먼저 낮아지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서어나무의 촘촘한 가지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마치 바깥세상과 마을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처럼 느껴졌다.
숲 주변에 조성된 데크길을 걸으며 서어나무숲이 주는 기운을 듬뿍 마셨다. 바람소리에 스치는 서어나무 잎들의 소리는 걷는 내내 잔잔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숲에서의 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운봉 고원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소나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삼산마을 노송군락지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노송들이 줄지어 서서 멋지게 곡선미를 자랑하는 와송숲이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들은 바람이 불어온 방향, 눈과 비를 맞아온 시간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숲은 자연 발화로 자란 나무들로 이뤄져 심은 사람은 기록조차 없다. 힘겨운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버텨온 이 숲의 소나무들을 연구하기 위해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고유식물종인 붉은병꽃나무를 포함해 총 220종의 야생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숲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췄다. 노송들은 키를 겨루듯 높이 자라기보다는 제각기 이리저리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휘어진 줄기들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뻗어가고 있었고, 거칠게 갈라진 껍질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나무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숲에서는 곧음보다 버팀이 먼저 느껴졌다.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서 아주 가까이에 노송군락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함께 둘러보기에 부담이 없었다. 부드러운 서어나무숲과 강인한 와송숲은 전혀 다른 숲이었지만 색다른 숲을 이어서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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